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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헌종 11년(1845년)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다불뤼 신부와 함께 황산 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초대주임이었던 베르모넬(장약슬, 요셉) 신부가 중심으로 1906년 건물을 시공하여 1907년 완공하였다.
전북 익산시 망성면 나바위1길 146
http://www.nabawi.kr/
나바위 성당은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 있다.
‘화산리’라는 지명은 지금 성당을 담고 있는 산이 절경이어서 송시열이 지어준 화산에서 유래하였다.
성당 이름도 산 이름을 따라 화산성당이라고 불러 오다가 완주군 화산면과 혼동을 피하고자 1989년부터 ‘나바위성당’으로 부르고 있다.
1882년 나바위 공소가 설립 되고 1897년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베르모렐(Vermorel Joseph, 1860-1937, 한국명 : 장약슬張若瑟 요셉)신부가 임명되어 1907년 성전을 신축하였고, 당시 신자수는 2,900여명이었다. 1921년 6월에는 현 논산부창동 본당을 설립 분리 시켰으며, 1930년경에는 신자수가 3,200명에 달하였으며, 안대동(현 함열) 본당, 군산(현 둔율동) 본당, 이리(현 창인동) 본당 등을 설립, 분리시켰다.
일제시대에는 신사 참배 거부에 앞장섰으며, 6.25 전쟁 중에도 미사가 끊이지 않은 유일한 본당이었다.
나바위 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5년 10월 12일 밤, 조선교구 3대 교구장이신 고 페레올 주교와 안 다블뤼(Daveluy) 신부 그리고 11명의 조선교우들이 첫 발을 내딛은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로는 면천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미 증조부 복자 김진후 비오와 숙조부 복자 김한현 안드레아, 당고모 성녀 데레사, 부친 성 김제준 이냐시오가 순교한 순교자 가문이다.
솔뫼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하게 된다. 이때가 7살이었다. 김대건의 부친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신 순교성인이시다. 김대건이 첫영성체를 한 것은 1836년 1월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해서였다.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적당한 소년을 찾고 있던 중 골배마실 은이공소에서 김대건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발하게 된다.
어린 몸에 어려운 길을 서슴지 않고 따르겠다고 나선 소년 김대건의 소망은 겨레의 영혼을 구하겠다는 너무나도 거룩하고 원대한 것이었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은 7월에 서울로 올라와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해 12월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귀국하는 길에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장차 한국교회의 순교성인으로 빛날 교우들인 정하상 바오로, 현석문 가롤로, 조신철 가롤로의 호송을 받으며 일행은 고국산천을 작별하고 부모를 떠나 만주땅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세 소년은 조선의 교우들과 작별하고 중국인 안내자를 따라 봉천, 산해관, 북경, 천진, 광동을 거쳐 목적지인 마카오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세 소년은 1837년 6월 6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에 도착한다. 그러나 함께 갔던 최방제가 1년만에 병사하는 불행을 맞는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조국에서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김대건의 부친과 최양업의 부모님이 순교하게 된다. 모방(Maubant) 나 신부와 2대 교구장이신 앵베르 주교 그리고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한국교회의 지도급 교우들이 순교하는 대박해였다.
조선은 또다시 목자 없는 교회가 되어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김대건은 1844년 조선교구 3대 교구장으로 선임된 페레올 주교에게 12월 15일에 부제품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선교사의 조선 영입을 위해 1845년 1월 김대건은 의주쪽으로 어렵게 혼자 입국하는데 성공한다. 그에게는 교회의 실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조선교회에 주교를 맞아 들여야 하는 중대한 의무가 주어져 있었다. 외국인 성직자들이 육로로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작은 배 한 척을 사서 현석문 가롤로 등 11명의 교우들과 상해로 돌아간다. 그리고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20리쯤 떨어진 김가항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된다. 조선교회창립 61년만의 일이었다.
8월 31일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라파엘호’라고 이름을 붙인 작은 어선을 타고 조선을 향해 출발한다. 라파엘호가 처음에는 요동방면으로 가는 중국 배에 끌리어 산동성까지 무사히 이르렀으나 갑자기 거센 풍파를 만나 키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 물결이 치는대로 배를 맡기게 되었다. 9월 28일 라파엘호는 제주도의 해안에 닿게 된다. 이로부터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금강으로 접어들어 60리쯤 올라가서 은진군 강경에서 조금 떨어진 나바위에 상륙하게 된다. 9년 만에 사제가 되어 돌아온 김대건 신부와 꿈에도 그리워하며 6년을 포교지를 향해 준비한 페레올 주교의 감사의 기도로 나바위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1845년 10월 12일 밤, 방갓과 상제옷으로 몸을 가린 후 어두운 밤 나바위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상해를 떠난 지 바닷길 42일만이었다. 바로 이 세 분 성직자들의 거룩한 첫마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나바위 성지이다.
나바위는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가 되어 조국에 입국하며 첫발을 디딘 축복의 땅으로 ‘첫 마음의 성지’ 로 불리고 있다.
1836년 12월, 15세의 나이로 조국을 떠나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을 마치고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월 선교사들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고 그들이 거처할 집을 마련코자 서울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1845년 4월 선교사를 모셔올 목선을 구입하여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 그 해 8월 17일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8월 31일, 11명의 교우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타고 갔던 배편으로 귀국길에 올라,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끝에 1845년 10월 12일 밤 8시 경 강경에서 좀 떨어진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닻을 내렸다. 나바위로 정박한 이 일을 페레올 주교는 그의 편지에서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였다.
1845년 8월 31일 김대건 신부는 중국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한국인 신자들과 함께 포교지인 한양을 향하여 라파엘호를 타고 항해하였다.
그러나 폭풍우와 풍랑을 만나 돛 대와 키가 파손되어 표류 하다가 제주도 용수리에 닿았다.
그곳에서 배를 정비하여 다시 북상하였으나 반파 상태인 배로는 항해가 불가능하자 계획을 바꾸어 강경에 정박하기로 하였다.
선원 일행 중에 강경 신자들과 강경 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 있던 자가 있었다. 당시 강경포는 조선 3대 어시장 중 하나였으므로 번잡하고, 황산포와 낭청포는 나루가 있어 사람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그러기에 배들의 오고감이 드물고 상선도 정박하지 않던 아주 작은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가 착륙하기 알맞은 곳이었을 것이다.
글 출처: 나바위성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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