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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소식

조선왕조실록, 적상산사고 봉안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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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적상산 사고 봉안 재연은 단순한 재연행사가 아니라 400여 년 전 무주군의 역사와 문화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지난 296년 동안 조선 472년의 역사를 온전히 지켜낸 사고(史庫)의 고장으로서 군민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며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무주군만의 특별한 역사 ․ 문화 ․ 관광콘텐츠를 발굴해 후대까지 온전히 전승하는 걸음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가치와 적상산사고의 역할에 대해 더 정확히 알고, 더 많이 알려야 한다는 책무가 내재돼 있다고 보면 되겠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제1대 왕 태조로부터 제25대 왕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편년체)한 역사서로 총 1,893권 888책으로 구성돼 있다. 실록은 권질(卷秩)의 방대함과 아울러 조선시대 정치 ․ 외교 ․ 군사 ․ 제도 ․ 법률 ․ 경제 ․ 산업 ․ 교통 ․ 통신 ․ 사회 ․ 풍속 ․ 미술 ․ 공예 ․ 사상 ․ 도덕 ․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역사 기록물로 꼽힌다. 1973년 12월 31일 조선왕조실록 필사본 · 인쇄본, 정족산본과 태백산본 등이 일괄 국보 제151호로 지정됐으며, 1997년 10월 1일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유산이자 자료이며 가치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조실록(李朝實錄)’이라고도 불렸는데 이 명칭은 일본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무시하기 위해 붙인 것이어서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 시기 일본인들의 지시를 받으며 편찬된 ‘고종황제실록’과󰡐순종황제실록󰡑은 사실의 왜곡 또한 많아 실록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면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를 의미한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종 13년(1413)에 ‘태조실록’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이어 세종 8년 (1426)에 ‘정종실록’을‘정종 실록’을, 5년 후인 1431년에는 ‘태종실록’을 편찬했다. ‘태종실록’ 편찬 직후 보관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삼조(태조, 정종, 태종) 실록(三朝實錄)은 고려시대 실록이 보관돼 있던 충주사고에 봉안됐다. 하지만 충주사고는 민가 밀집지역에 위치해 화재위험이 크다는 염려가 일었고 사헌부의 건의로 1439년 6월 전주와 성주에 사고가 새로 설치에 이른다. 이후 1445년 11월까지 삼조실록을 3부 더 등사해 총 4부를 춘추관과 충주 · 전주 · 성주 등 4곳의 사고에 각기 1부씩 봉안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에 의한 병화로 춘추관과 충주 ․ 성주사고 실록은 모두 소실됐으며 전주사고 실록은 그해 6월, 전라도 태인의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금산에 왜군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를 털어 모두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1년여 동안 지키다 정부에 반환했다. 전주사고에는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 실록 804권과 기타 소장 도서들이 보관돼 있었다.

 

1593년 7월 내장산에서 실록을 넘겨받은 정부는 이를 해주와 강화도를 거쳐 묘향산으로 옮겨 보관했다. 왜란이 평정된 뒤, 궁핍한 국가재정과 물자 부족에도 불구하고 1603년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2년 9개월 동안 '태조실록'부터태조실록' '명종실록'까지명종실록' 까지 13대에 걸친 실록 804권을 인쇄 · 출판했다. 이때 출판한 실록은 3부였지만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 원본과 재출판할 때의 교정본(校正本)을 합해 총 5부가 됐다. 1부는 국가가 참고하기 위해 서울 춘추관에 뒀으며 다른 4부는 병화를 면할 수 있도록 깊은 산속이나 섬을 선택해 강화도 마니산(전등사), 경상도 봉화 태백산(각화사), 강원도 평창 오대산(월정사), 평안도 영변 묘향산(보현사)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고 각각 1부씩 나눠 보관했다. 서울 춘추관 소장 실록은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 때 모두 불타버렸다. 그리고 그 뒤 다시 복구되지 않아 춘추관에서는 실록을 보관하지 않게 되었다. 때문에 인조 이후에는 4부를 간행해 4사고에 각각 1부씩 나누어 보관했다.

 

 

 

 

한편, 북방에 위치해 있던 묘향산 사고는 만주에서 새로 일어난 후금과의 외교관계 악화로 위협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고관리 소홀로 소장 도서가 망실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남쪽의 안전한 장소로 실록을 옮기자는 논의가 일었고, 1610년(광해군 2)에 순안 어사(巡按御史)(巡按御史) 최현(崔睍)과 무주 현감 이유경(李有慶)의 요청에 따라 사관을 적상산으로 보내 땅 모양을 살피고 산성을 수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1612년 무주 적상산으로 이치(移置) 장소를 확정했다. 이에 1613년 사각을 짓기 시작했으며 광해군 6년(1614)에 실록각(實錄閣)을 건립했다. 4년 뒤인 광해군 10년(1618년) 9월 선조대왕 실록을 봉안했다. 그리고 인조 12년(1634.12.3)까지 묘향산 사고에 있던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실록 260260 책과 춘추관에 봉안돼 있던 ‘광해군일기’ 39 책을 함께 이곳으로 옮겨서 봉안했다. 이후 인조 19년(1641)에는 선원각(璿源閣)을 건립하고, 조선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함으로써 적상산사고는 선사 양각을 갖춘 완전한 사고로서 역할을 하게 됐다.

 

사고 설치 직후에는 승병장 덕웅(德雄)이 승병 92명을 모집해 산성을 수축(修築)하는 한편, 분번(分番)으로 사각(史閣)을 수호했다. 특히 인조 5년(1627)정묘5년(1627) 정묘호란 때는 사고를 지킬 사람이 없어 승려 상훈(尙訓)이 사고의 서책을 성 밖의 석굴(石窟)로 옮겨 보관했다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사고에 봉안했다. 1636년(인조14년)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마니산사고의 실록이 산실(散失)되어 이를 다시 보완하는 작업이 29년 후 1665년(현종 6)에 시작됐다. 이때 적상산 사고 본을 근거로 등사·교정 작업을 했는데 3도(三道) 유생(儒生)이 300명이나 동원됐다. 후금의 잦은 침략으로 사고의 수호가 어려워지자 정부에서는 사고 보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인조 17년 박황의 건의로 무주와 금산, 진산, 용담, 진안, 장수, 운봉현 등 인근 77개현을 적상산성에 분속 시켜 산성을 수축하게 했다. 1643년 산성 안에 호국사(護國寺)를 창건 사각 수호 사찰로 하는 등 산성이 정비되면서 도적떼나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주현에는 적상산사고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사회문제가 생겼다. 백성들이 산성과 사고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세금과 부역에 시달려야 했던 것. 포쇄(曝曬), 고출(考出), 봉안(奉安) 등 출장 온 관리들의 접대비용과 산성정비, 풀베기 등의 각종 부역으로 백성들의 곤궁함이 극에 달했고 무주현은 금산현의 안성소 등을 무주로 편입시켜달라는 2차례 상소를 올리게 됐다. 결국 현종 15년(1674)15년(1674) 무주현이 무주 도호부로도호부로 승격되면서 금산현의 안성 소와 횡천 소가 무주로 편입됐고, 무주 도호부사는 적상산성의 수성장과 토포사를 겸하게 되면서 분속 된 각 고을을 통제하게 하였다. 이후 고종 32년(1895) 지방 관제를 23부 331군으로 개편할 때 무주 도호부도 무주군으로 바뀌면서 221년간의 도호부를 마감했다.

조선 말기에는 사고가 퇴락해 1872년(고종 9) 실록각과 선원각을 개수했으며, 1902년에는 대대적인 중수 공사가 진행됐다. 적상산성과 적상산사고의 규모 등은 시기에 따라 달랐을 것이나 ‘국역 적 성지’’ 기록에 의하면 적상산성의 둘레는 16,920자(약 5.1km), 우물이 33곳, 연못이 4곳 있었으며, 적상산사고에는 실록각이 12칸, 선원각 9칸, 승장청 6칸, 수사당 6칸, 무기고가 7칸, 화약고가 1칸 등이 있었다.

 

 

 

 

 

 

 

                                                            (자료출처 : 무주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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